볼거리와 가능성과 희망이 넘쳐나는 도시,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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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거리와 가능성과 희망이 넘쳐나는 도시, 뉴욕 뉴욕시는 허드슨 강 어귀에 자리하고 있으며, 거기서 롱 아일랜드 사운드의 서쪽 끝과 만난다. 도시는 실제로 5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 면적은 약 800㎢이며, 브롱크스, 브루클린, 맨해튼, 퀸즈, 스태튼 아일랜드라는 다섯 개의 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 150만 명의 맨해튼 지역 대부분은 남북/동서 방향으로 번호를 붙여 구획 지은 도로 체계 덕분에 돌아다니기가 쉽다. 14th St 이남에서는 거리들이 제멋대로 복잡해지므로 통행이 까다로워진다. 워싱턴 스퀘어 위쪽, 5th Ave는 이스트 사이드와 웨스트 사이드를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브롱크스(인구 120만 명)는 가장 북쪽의 행정구이자 유일하게 본토에 붙어 있다. 브루클린은 롱 아일랜드의 서쪽 끝에 있으며, 인구 230만 명으로 맨해튼 이외의 행정구 중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산다. 롱 아일랜드에서 브루클린과 맞닿는 퀸즈는 뉴욕에서 가장 큰데다 다양한 민족이 많이 모여 사는 행정구로서 약 200만 사람들이 120가지 언어를 사용한다. 브루클린 남서쪽 스태튼 아일랜드(인구 44만 3,000명)에는 유명한 무료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뉴욕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고 생기발랄한 도시다. 볼거리와 가능성과 희망이 넘친다. 어떤 사람은 지하철에서 치실로 이를 청소하고, 웨이터가 도서관에서 소설을 쓰는가 하면, 또 말쑥하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앵무새를 어깨에 올려놓은 채 매디슨 가에서 쇼핑을 한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여긴 뉴욕, 들썩거리는 곳, 세상 어디에도 뉴욕에 견줄만한 곳은 없다.
뉴욕은 자기 원하는 대로 선하고, 악하고, 재미있고, 친절하고, 무관심한 인간들의 축제장이다. 사람들은 즉흥 랩을 하고, 어린 꼬마를 정신과에 데려가기도 하며, 난데없이 우산을 들고 나타나 비바람 속에 팔고 돌아다닌다. 당신이 핫도그 수레에서 바닷가재 비스크(진한 크림 수프)를 팔건, 센트럴 파크에서 엉뚱한 춤을 추건, 아무도 눈 하나 까딱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맨해튼 사람들은 당황하기를 거부한다. 모든 것에 대한 답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뉴욕이니까요" 하면 그만이다.
뉴요커들은 가까운 뉴저지주 티넥부터 아프리카의 팀북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러분도 그들처럼 원하는 모든 꿈을 추구할 수 있다. 쉽지는 않다. 물가는 비싸고 무자비한데다 아직도 2001년 테러 공격으로 충격에 떨고 있다. 그렇지만 최상의 상황일 때 뉴욕은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대도시다. 조심하시라. 많은 방문객들이 떠나기 힘들어한다!
| 뉴욕의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만 1,000년 이상 지금 뉴욕시라고 알려진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 '맨해튼'이란 이름은 이 지역의 Munsee 인디언 어휘에서 유래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디딘 유럽인은 1524년에 온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였으나, 1609년에 헨리 허드슨이 처음으로 자신을 후원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대신해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식민지 시대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첫 번째 무역기지인 Nieuw Amsterdam을 설립했고, 알려진 대로 2년 후 60길더($24) 상당의 작은 선물을 주고 인디언에게서 맨해튼 섬을 매입함으로써 소유권을 공고히 했다. 1647년에 피터 스투이베산트가 이 제멋대로인 식민지에 질서를 잡으려고 부임했지만, 그의 편협한 종교적 관점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1664년, 영국인에 의한 무혈이양에 저항하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영국은 식민지의 이름을 뉴욕으로 바꾸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에 대한 소소한 저항이 생기기 시작했으나, 많은 뉴요커들이 독립전쟁에 반대했다. 뉴욕은 영국의 거점 기지가 되었다. 영국 왕 조지 3세의 군대가 미국독립전쟁 중 대부분 기간 동안 이 도시를 다스렸다. 발전기 조지 워싱턴은 1789년에 뉴욕에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했지만, 건국의 조상들은 그 당시 인구 3만 3,000명의 번잡하고 더러운 항구였던 이 도시를 싫어했다. 토마스 제퍼슨은 뉴욕을 '인간 본성의 타락상이 모두 모여드는 하수구'로 묘사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좋아해서 1830년에는 인구가 25만 명으로 불어났다.
맨해튼의 독특한 도로구획은 1811년에 설계위원회에 의해 책정되었다. 1842년에는 공중 보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크로톤 수도교Croton Aqueduct를 통해 민물을 끌어들였다. 상업과 경제 기반시설이 급격히 발전했다. 증가하는 고통 폭발적인 성장은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부패한 정치인들은 공공사업 프로젝트에서 수백만 달러를 착복하고, 산업계의 거물들은 비과세로 재산을 축적했다. 극빈층 뉴요커들은 위험한 공장에서 일하고 더러운 공동 주택에서 살았다.
중심가 비즈니스 지구의 공간 부족이 심화되어 이제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19세기 후반 즈음에는 맨해튼에 '마천루'라 불리는 고층빌딩 군락이 형성되었다. 확장되어 나가는 지하철과 고가전차 덕분에 도시 외곽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고, 1898년에는 각기 독립적으로 성장해나가던 퀸즈, 스태튼 아일랜드, 브롱크스, 브루클린이 모두 합하여 뉴욕시를 이루는 '행정구'가 되었다. 유럽 이민자들이 또다시 유입되면서 이 새로운 메트로폴리스는 1900년 300만 명이던 인구가 1930년에 700만 명으로 급증했다. 대공황은 엄청난 고통을 불러왔지만 시장인 피오렐로 라 구아디아는 사회 복지망을 확장했다.
쇠퇴와 재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은 세계 제일의 도시가 되었으나, 곧 중산층이 교외로 빠져나가면서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텔레비전 프로덕션, 제조업, 심지어 전설적인 브루클린 다저스 야구팀까지 웨스트 코스트로 이주했다. 1970년대에는 연방정부의 엄청난 융자로 겨우 뉴욕시의 파산을 막았다. 화려한 3선 시장 에드 코크의 주도로 1980년대에 뉴욕은 지난 시절의 위세를 상당부분 회복했다. 주기적으로 인종적 갈등으로 인한 분열을 겪으면서도 뉴욕은 1989년에 첫 번째 흑인 시장인 데이비드 딘킨스를 선출했다. 실망스럽게 임기를 마친 후 그는 뉴욕의 절대 다수 민주당 유권자들에 의해 쫓겨나고(잔인한 아이러니다) 공화당원 루디 줄리아니가 그 자리에 올랐다. 줄리아니는 두 번 연임하면서 주민을 양극화시켰다. 그렇지만 범죄를 척결함으로써 논란에도 아랑곳 않고 타임즈 스퀘어, 이스트 빌리지, 할렘을 새단장했다.
오늘날의 뉴욕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 공격으로 슬픔에 빠지고 냉혹한 현실을 자각했지만, 뉴욕은 시민적 긍지와 공동체 의식의 독특한 결합으로 위기에 대응했다. 비탄과 공포 속에서도 뉴욕은 여전히 무질서하게 번성하는 도시다.
뉴욕의 지리 및 기후
뉴욕의 지리 뉴욕은 5개의 자치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맨해튼, 브롱크스, 부르클린, 퀸스, 스탠튼 섬이다. 맨해튼과 스탠튼 섬은 독립된 섬이고, 퀸스와 부르클린은 대륙을 따라 길게 놓인 롱 아일랜드 남단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 곳은 브롱크스뿐이다. 뉴욕을 가리켜 흔히 '수상의 도시'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인데 이들 5개 지역은 60여 개의 교량과 해저터널 및 페리보트 항로로 연결되어 있다. 뉴욕의 기후 뉴욕은 한국처럼 사계절이 있으며,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봄과 가을, 특히 10월 초-11월 초가 맑고 쾌적하여 가장 아름답고 지내기에 좋다. 여름은 몹시 무더워 7, 8월에는 30℃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되지만 습도가 낮아서 체감 온도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면 충분하지만 뉴욕에서는 극장이나 레스토랑 등에 들어갈 때 정장을 요구하는 일이 많으므로 정장을 한벌쯤 준비해 간다. 뉴욕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계절은 겨울. 12~2월의 혹한기는 몹시 춥고 눈도 많이 내리므로 이 시기에 뉴욕을 방문하려면 코트와 모자, 방한화는 필수다. 연평균기온 12.6℃. 뉴욕의 정치와 경제 뉴욕의 정치 뉴욕 시민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왔지만, 퀸즈와 브루클린의 블루 칼라 거주지와 교외 스태튼 아일랜드 일대에는 보수적인 유권자들도 있다. 루돌프 줄리아니의 경우에서 증명되었듯이 민주당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공화당 개혁파도 시장으로 당선될 수 있다.
많은 지역 공동체에 지역 활동가들이 있다. 탁아와 무료 급식, 근린 공원 외에도 주민들이 주도하는 프로젝트가 많아 이웃의 훈기를 느낄 수 있다. 도시의 정치적 구도에는 5개 행정구역장들이 포함되고 시 감사관과 변호사가 참여한다. 뉴욕에도 각 동네별 대표의원 51명으로 구성된 시의회가 있다. 시의 행정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나 지금까지는 정치적 참여도가 낮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정치적으로는 신참인 공화당 출신 미디어 재벌 마이클 블룸버그는 2001년 후반에 시장 선거에서 승리하여 뉴욕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도시의 경영을 맡았다. 뉴욕의 경제 뉴욕의 재정은 세계무역센터 참사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이 재난은 이미 비틀거리던 뉴욕 경제에 치명타를 입혔다. 연방정부의 지원금이 손실을 완화시켰다 해도 그것은 온 도시의 회계 대장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뉴욕은 여전히 자기들만의 도시 국가로서 홀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재정, 관광, 미디어 분야를 주도하는 이 도시에는 주요 미국 기업들과 유명 외국계 기업들이 자랑스럽게 간판을 내걸고 있다.
뉴욕의 사회와 문화 뉴욕은 인종적 다양성 면에서 독보적인 예가 된다. 미국의 '용광로'라는 평판을 뒷받침하듯이 주민의 30%가 외국 태생이다. 중심가에서는 아시아인과 이탈리아인이 차이나타운과 리틀 이탈리아에 독특한 개성을 불어넣었고, 히스페닉계 공동체들은 이스트빌리지와 할렘 남쪽에 둥지를 틀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여전히 할렘 전역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그룹이다. 워싱턴 하이츠에는 도미니카 공화국과 엘살바도르 출신 이민자들이 모여든다.
이 외에도 많은 인종 집단이 행정구역마다 퍼져 있다. 유대계 인구의 대다수는 한때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 거주하다가 브롱크스, 브루클린, 퀸즈로 옮겨갔다. 그러나 아직도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는 유대계가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플러싱에 주로 살고 에콰도르인과 컬럼비아인은 퀸즈에 정착했다(그리스 사람들은 아스토리아에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다). 간간이 인종적 갈등이 폭발함에도 불구하고 뉴욕은 미국에서 인종적으로 가장 잘 통합된 도시에 속한다. 행복한 대가족을 이루었다기보다는(이루지 못했다) 온갖 배경의 수백만 뉴요커들이 서로 가까이 살면서 대체로 별 사고 없이 지낸다는 의미다. 에티켓 뉴욕에 맞도록 특별한 차림새를 할 필요는 없다. 사실상 어떤 모습도 괜찮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섹스 바에 갈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최상의 태도는 자신감이다. 정말로 이 도시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세련된 관광객조차도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이방인 취급을 받을 수 있다. 빌딩을 올려다보거나 복잡한 지하철에서 <뉴욕타임스>를 세로와 가로로 각각 한 번씩 접지도 않고 펼친 채 읽으려 한다든지 해서 말이다.
흡연 발암성 막대기인 담배는 공공기관, 사무실, 콘서트장, 극장, 택시, 대중교통수단에서 금지되어 있다. 대부분의 식당은 금연 구역이다. 단지 대다수 클럽과 바에서만은 자신 있게 담배 연기를 내뿜어도 된다.
뉴욕의 환경 오랫동안 공기와 수로의 질을 높이려고 많은 애를 썼으나 거리는 여전히 청결함과 거리가 멀고, 기반시설은 조속한 보수가 필요하다. 여름날의 열기는 전력 공급에 과부하를 초래해 짧은 정전을 일으키며, 폭우가 내리면 지하철 운행이 중단될 수도 있다. 겉보기에는 썩 훌륭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언제 어느 때 마비될지 모른다.
재활용 노력은 엉성하고, 불필요한 소비가 만연해 있다. 이 도시는 매일 1,188만kg의 쓰레기를 배출한다. 그러나 도시 자체만큼이나 자연도 회복되어 왔다. 1986년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쓰레기 처리장이 개설되면서 허드슨 강은 쓰레기 하치장에서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되돌아왔으며, 이스트 강에서는 잔점박이 물범(harbor seal)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뉴욕의 예술
무용 뉴욕은 미국의 뛰어난 무용단과 마사 그레이엄을 비롯한 수많은 안무가들을 길러냈다. 러시아 태생의 안무가 조지 발란신은 뉴욕시립발레단을 창립했다(현재 단장은 피터 마틴스). 앨빈 에일리, 마사 그레이엄, 폴 테일러 무용단과 할렘 무용단Dance Theatre of Harlem이 매년 이곳에서 공연을 한다. 영화 마틴 스콜세지는 도시의 어두운 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우디 앨런은 언제나 코믹한 면을 발견한다. 스파이크 리의 장편 영화는 뉴욕의 인종적 긴장을 드러냈다. 할리우드의 A급 배우들은 대개 웨스트 코스트와 뉴욕에 집을 가지고 있다. 뉴욕커들 중에는 로버트 드니로와 기네스 펠트로도 있다. 문학 뉴욕시의 문학적 정경은 F. 스콧 피츠제럴드, 헨리 제임스, 에디스 워튼, 제이 매키너니, 톰 울프 등의 재능을 키워주었다.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들 중에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마이클 커닝햄과 호주 작가 피커 캐리도 있다. 문학 면에서 뉴욕을 살펴보고 싶다면 션 오코넬의 <Remarkable, Unspeakable, New York>이란 책을 보시라. 미국의 작가들이 2세기에 걸쳐 미국 최대의 메트로폴리스인 이곳을 어떤 식으로 생각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음악 뉴욕에는 최상의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단이 있으며, 구스타프 말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레너드 번스타인, 존 케이지를 비롯한 선두적인 작곡가들과 지휘자들이 이곳에서 부와 명성을 쌓았다. 20세기 초에 와서 가장 인기 있는 장르가 된 래그타임(재즈의 한 종류)은 스콧 조플린과 어빙 벌린 덕분에 인기를 얻게 되었다. 조지 거쉰과 듀크 엘링턴 덕택에 재즈는 뉴욕에서 주류 음악에 편입되었다. 트럼펫 주자 디지 길레스피와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는 비밥의 시대를 열었고, 이어 마일즈 데이비스와 소니 롤린스의 좀더 자유로운 표현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제 윈튼 마살리스와 조슈아 레드먼이 음악의 방향을 이끌고 있다. 존 존John Zorn은 실험적인 즉흥 음악의 선두에 서 있다.
밥 딜런,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같은 록음악의 아이콘들은 뉴욕에서 수많은 팬을 거느렸다. 떠오르는 젊은 밴드로는 스트록스The Strokes를 들 수 있다. 회화 에드워드 호퍼는 뉴욕과 관련해 가장 잘 알려진 화가에 속한다. 또 다른 화가로는 인상파 화가 칠드 하쌈, 마리 카사트, 다다이스트 마르셀 뒤샹, 표현주의 추상화가 잭슨 폴락과 윌렘 드 쿠닝 등이 있다.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장 미셀 바스키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뉴욕 예술계의 신전에 거물로 자리하고 있다. 사진 뉴욕과 관련된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만 레이가 있는데, 둘 다 사진을 예술의 한 형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도움을 주었다. 리처드 아베돈, 애니 리에보비츠, 허브 리츠, 저명한 포토저널리스트인 마가렛 부르크화이트와 알프레드 아이젠스태트도 뉴욕 출신이다. 연극 브로드웨이는 유진 오닐, 샘 셰퍼드, 오거스트 윌슨, 데이비드 마멧, 닐 사이먼과 아서 밀러를 비롯한 가장 유명한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상연해왔다. <틴 팬 앨리Tin Pan Alley>(직역하면 ‘양철 냄비 골목’이라는 뜻으로, 1950년대 뉴욕에서 주류 음반사들이 있던 거리를 음악 소리 때문에 시끄럽다는 의미로 이렇게 불렀다. 현재는 달콤하고 대중적인 팝을 일컫는 말) 작곡가인 조지 거쉰과 콜 포터는 오래도록 사랑받는 뮤지컬들을 다수 제작했다. 이것이 뉴욕 무대의 매력이다. 오늘날 브로드웨이는 과하게 부풀려진 대작들로 채워진 타임즈 스퀘어 극장들을 뜻한다. '오프-브로드웨이'는 뉴욕시 다른 지역의 더 작은 공간(200석 이하)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을 말한다. '오프-오프-브로드웨이' 행사는 100석 이하의 장소에서 공연되는 비주류의 실험적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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